매년 찬 바람이 불고 가을빛이 짙어질 무렵이면 아내와 손을 잡고 창덕궁 후원을 찾는 것이 우리 부부의 오랜 연례행사입니다.
올해는 단풍 시기보다 조금 이르게 방문했는지 나뭇잎들이 아직 붉은 물을 온전히 들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푸르름과 옅은 황금빛이 교차하는 초가을의 싱그러운 정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1. 부용지와 주합루의 우아한 자태
후원 입구를 지나 언덕길을 넘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이 바로 한국 전통 정원의 백미, 부용지(芙蓉池) 입니다.


- 하늘과 땅을 담은 연못: 네모난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을 띄운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조형미와, 연못 물가에 두 발을 담그고 있는 부용정의 날렵한 팔작지붕이 물 그림자와 어우러져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연출합니다.
- 주합루와 어수문: 연못 뒤편 언덕 위로 당당히 서 있는 왕실 도서관 규장각(주합루)과 물고기와 물의 상생을 뜻하는 어수문(魚水門)의 자태는 언제 보아도 기품이 넘칩니다.

2. 불로문과 애련지, 그리고 존덕정의 정취
발걸음을 옮겨 불로문(不老門)을 지나 애련지(愛蓮池)와 존덕정 권역으로 향합니다.


- 애련지와 연경당: 숙종 임금이 연꽃의 군자다운 풍모를 사랑하여 이름 붙인 애련지의 잔잔한 수면과, 사대부 살림집 양식으로 지어진 고즈넉한 연경당의 담장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줍니다.



- 존덕정의 육각 겹지붕: 우주를 상징하는 육각 이중 지붕 구조와 정자 천장에 정교하게 그려진 청룡 황룡의 벽화는 왕의 위엄과 철학을 드러냅니다.


3. 옥류천의 맑은 물소리와 가을 숲길
후원의 가장 깊숙한 은밀한 골짜기, 옥류천(玉流川)으로 들어섭니다.


- 임금의 휴식처: 거대한 소요암 바위를 깎아 만든 둥근 홈으로 물이 굽이쳐 흐르는 유배구(流觴溝)와 초가지붕을 얹은 소박한 청의정의 모습은 자연에 순응하고자 했던 조선 왕실의 소박한 풍류를 보여줍니다.


울창한 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맑은 피톤치드를 들이마신 힐링의 시간. 비록 붉은 단풍의 절정은 아니었지만, 번잡한 도심 한가운데서 고요한 왕실 정원의 정취를 온전히 누린 풍요로운 가을 산책이었습니다.